프롤로그: 머리카락이 여행의 시간을 알려줄 때
다낭에 도착한 지 3주째, 세면대 앞에서 머리를 말리다 문득 거울 속 옆머리가 제멋대로 솟아 있는 걸 봤습니다. 여행 중에는 유독 시간이 빠르게 흘러갑니다. 일정 체크리스트는 줄어드는데, 머리카락은 묵묵히 자라죠. 저는 늘 ‘머리를 자를 시기가 오면 그 도시와 더 가까워질 준비가 된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날은 관광객이 몰리는 미용실 대신, 동네 사람들이 드나드는 작은 이발소를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그 선택은 제 다낭 생활의 온도를 한 단계 높여준 작은 모험이었습니다.
골목의 표지판: 간판 대신 바리깡 소리
구글 지도에서 별점이 반짝이는 곳을 일부러 피했습니다. 대신 숙소 앞 시장 골목을 느리게 걸었습니다. 햇볕이 들지 않는 그늘길 끝, 낡은 양철문 반쯤 열린 가게에서 ‘지잉—’ 하고 바리깡 소리가 새어 나왔습니다. 간판에는 “Cắt Tóc Nam”이라는 단어가 희미하게 지워져 있었고, 유리문에는 축구선수 손흥민 스티커가 반쯤 뜯긴 채 붙어 있었습니다. 그 순간, ‘여기면 되겠다’는 감이 왔습니다. 여행에서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판은 반드시 글씨여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첫 인상: 오래된 선풍기와 새것 같은 미소
안으로 들어서니 공기 중에 샴푸 향과 드라이기 열기가 섞여 있었습니다. 천장에 매달린 선풍기는 ‘딱 딱’ 소리를 내며 천천히 돌았고, 기다란 거울 앞에는 닳은 가죽의자가 두 개 나란히 놓여 있었습니다. 중년의 이발사 아저씨가 저를 보더니 깜짝 놀란 듯 웃었습니다. “Xin chào!” 손짓으로 앉으라는 사인을 보내며 의자 쿠션을 툭툭 털어줍니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환영받는다는 느낌이 먼저 들어 마음이 풀렸습니다.
언어 장벽, 어떻게 넘나: 사진 한 장과 손가락 두 개
저는 휴대폰 앨범에서 평소 하던 ‘투블록 비슷한 짧은 컷’ 사진을 보여줬습니다. 아저씨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린 뒤, 손가락 두 개를 세워 ‘이 정도 길이?’라고 묻듯이 제 귀 옆에서 허공을 잘랐습니다. 저는 고개를 끄덕이며 “Short, but not too short.”라고 말했는데, 그는 못 알아듣는 대신 거울에 제 머리 형태를 손으로 그려 보였습니다. 언어보다 정확한 소통, 그 순간 저는 이미 절반은 안심했습니다.
컷의 리듬: 바리깡의 낮은 진동과 가위의 빠른 숨
목에 흰 천을 두르고, 얇은 비닐 케이프를 덮자 작은 예식이 시작됐습니다. 바리깡이 처음 닿는 순간, 쇄골을 타고 내려오는 낮은 진동이 느껴졌습니다. 귓바퀴 주변을 따라 도는 동안 그는 호흡을 거의 멈춘 듯 집중했고, 가위로 윗머리를 정리할 때는 ‘칙칙’ 하는 소리가 마치 메트로놈 같았습니다. 저는 눈을 감고 ‘만약 실패하면 모자를 쓰면 되지’라고 생각하다가도, 기계적인 손놀림에 신뢰가 쌓여가는 게 느껴졌습니다. 가끔 그는 제 머리카락을 검지와 중지로 끼워 길이를 확인했고, 남은 손으로는 이마의 작은 잔털을 톡톡 털어냈습니다.
현지의 디테일: 면도칼, 파우더, 그리고 라임 향 샴푸
컷이 끝났을 때쯤, 그는 작은 금속 케이스에서 면도칼을 꺼냈습니다. 살균 알코올을 적신 솜으로 칼날을 닦고, 제 귀 주변과 목덜미를 조심스럽게 정리했습니다. 칼날이 지나간 피부에는 시원한 파우더가 솔로 흩뿌려졌고, 그 입자가 목을 타고 내려가 햇살에 반짝였습니다. 이어 작은 세면대 앞 의자로 이동해 샴푸를 했는데, 라임 향이 확 퍼지며 두피의 더위가 쑥 내려갔습니다. 물 온도는 정확했고, 그는 손가락 끝으로 원을 그리며 두피를 ‘지압하듯’ 눌러줬습니다. 여행 중 쌓인 피로가 거품과 함께 흘러내리는 기분이었습니다.
예상 못한 서비스 ① 5분 어깨 마사지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고 나니, 그는 제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더니 그대로 마사지로 넘어갔습니다. 초보적인 동작이 아니라, 리듬 있는 압이었습니다. 승모근을 아래에서 위로 쓸어 올리고, 목 뒤를 엄지로 원을 그리듯 눌러주었습니다. ‘이건 추가요금인가?’ 걱정이 스치자, 그는 “서비스”라고 짧게 말하며 웃었습니다. 여행자에게 가장 고마운 단어가 그 두 음절일지도 모릅니다.
예상 못한 서비스 ② 귀 청소의 섬세함
그리고 진짜 예상 밖의 하이라이트. 얇은 도구를 꺼내 귀를 조심스럽게 정리해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금세 ‘자잘한 소리까지 선명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한국에서는 거의 받아보지 못한 서비스라 새로웠고, 그가 끊임없이 거울로 빛을 반사해 각도를 확인하는 모습에서 묘한 장인 정신마저 느꼈습니다.
가격의 역설: 싸다고 가볍지 않다
카운터 대신 계산기는 낡은 서랍에서 나왔습니다. 아저씨는 50,000을 눌러 보여줬고, 저는 습관처럼 한 번 더 물었습니다. “커트, 샴푸, 면도, 마사지, 귀?” 그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한화로 약 3천 원 남짓. 가격이 저렴하다는 사실보다, 그 가격에 담긴 시간과 손길, 숙련의 감각에 더 놀랐습니다. 저는 감사의 의미로 소액을 더 얹었습니다. 그는 크게 손사래를 치다가, 결국 작은 미소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순간, 돈은 계산이 아니라 인사의 확장처럼 느껴졌습니다.
작은 대화, 큰 연결: 축구와 가족 이야기
드라이를 마치는 동안 옆자리 손님이 말을 걸었습니다. 어디서 왔느냐고 묻길래 한국이라고 하니, 그는 “손흥민!”을 외치며 엄지를 들어 보였습니다. 저는 베트남 대표팀을 칭찬했고, 그는 휴대폰으로 최근 경기 하이라이트를 보여주었습니다. 이어 이발사 아저씨가 손님과 빠르게 대화를 나누더니 제게 손짓으로 “아들, 대학 합격”이라며 사진을 보여줬습니다. 샴푸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공간에서, 우리는 국적을 넘어서 서로의 일상을 짧게 건넸습니다.
거울 속 결과: 실패를 걱정한 시간의 민망함
최종 점검에서 그는 앞머리를 2밀리미터 정도 더 다듬자고 제안했습니다. 작은 가위로 끝을 정리한 뒤 거울을 돌려 뒷모습을 보여줬는데, 라인이 생각보다 훨씬 깔끔했습니다. 저는 무의식적으로 엄지를 올렸고, 그도 같은 제스처로 화답했습니다. 실패할까 걱정했던 시간이 조금 민망해질 정도의 결과였습니다. 무엇보다 제 얼굴이 그 도시의 공기와 더 잘 어울리게 된 것 같았습니다.
거리로 나서며: 바람이 머리카락 사이를 통과하는 감각
문을 나서자마자 뜨거운 바람이 머리결 사이로 통과했습니다. 컷 이전에는 흐트러짐으로 느꼈던 바람이 이제는 ‘환기’처럼 느껴졌습니다. 골목 끝에서 커피포차 아주머니가 “카페 쓰어 다?” 하고 물어보길래,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연유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거울 대신 스마트폰 카메라로 머리를 살짝 확인했습니다. 화면 속 제 얼굴은 여행 첫날의 경직이 한 겹 벗겨진 듯 보였습니다.
현지 이발소 이용 팁: 두려움을 줄이는 다섯 가지
- 사진 한 장 준비: 말보다 정확합니다. 측면, 후면이 보이는 사진이면 금상첨화입니다.
- 길이 제스처: 손가락으로 ‘이만큼’ 표시하기. 수치(밀리미터)보다 직관적입니다.
- 핵심 단어 메모: “ngắn(짧게)”, “vừa(보통)”, “gội đầu(샴푸)”, “cạo(면도)” 같은 단어를 메모해 보여주면 좋습니다.
- 현금 소액 준비: 카드가 안 되는 곳이 많습니다. 소액 팁은 선택이지만 감사 표현으로 자연스럽습니다.
- 위생 체크: 칼날 소독, 빗과 타월 상태를 눈으로 확인하고, 불편하면 정중히 거절하세요.
여행이 생활이 되는 순간
이발소에서의 한 시간은 관광으로는 닿기 어려운 층위를 보여줬습니다. 가격표나 인테리어보다 선명하게 남은 건 ‘시간의 리듬’이었습니다. 예약 없이 찾아갔지만, 제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동네 아이가 학교에 가기 전에 앞머리를 다듬고, 배달기사 아저씨가 헬멧을 벗고 땀을 닦으며 의자에 앉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도시의 하루가 이발소를 관통해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잠깐 그 흐름 속에 함께 머물렀고, 그게 이 경험의 핵심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마무리: 다음 도시에서도, 먼저 이발소를 찾을 것이다
여행에서 머리를 자르는 일은 위험을 무릅쓰는 선택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다낭의 작은 이발소에서 저는 그 위험이 사실 ‘관계의 가능성’이었다는 걸 배웠습니다. 미용실과 이발소는 누구나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생활의 공간입니다. 거기에 들어가 의자 하나를 차지하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스쳐 지나가는 관광객이 아니라 잠시 그 동네의 사람이 됩니다. 다음 도시로 떠나더라도, 일정표의 첫 줄에 이발소를 적어둘 생각입니다. 머리카락은 다시 자라고, 낯선 곳에서의 작은 용기는 또 다른 문을 열어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