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디지털노마드’라는 단어를 접했을 때는 마치 영화 속 장면 같았습니다. 바닷가가 보이는 창가, 노트북 하나만으로 자유롭게 일하고, 낮에는 현지 시장을 구경하며, 밤이면 이국적인 거리를 산책하는 삶. 그렇게만 들으면 굉장히 낭만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그 삶을 살기 시작하면서 ‘집’이라는 단어가 제 안에서 얼마나 자주 되뇌어지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처음 동남아로 떠난 건 작년 이맘때였습니다. 한창 회사에서 탈출하고 싶어 하던 시기였고, 한국의 일상에 너무 지쳐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발리를 시작으로 베트남, 태국, 말레이시아 등을 옮겨 다니며 일하고 머물기 시작했습니다. 숙소는 주로 에어비앤비나 한 달 단위로 계약하는 스튜디오였고, 일은 한국의 클라이언트를 대상으로 원격으로 진행했습니다.
여행이 아닌 ‘거주’의 리듬으로 살아가다 보니, 낯선 공간이 곧 생활의 공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어느 도시든 일정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작은 루틴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아침에 가는 카페, 점심을 먹는 현지 식당, 저녁엔 종종 가던 헬스장이나 산책길. 그런 익숙한 반복 속에서 저는 ‘이곳이 집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떠도는 삶에도 ‘뿌리’는 내려진다
호이안에서 한 달을 보냈을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작은 골목 안에 자리한 저렴한 카페가 있었는데, 매일 아침 그곳에 가서 커피를 마시며 글을 쓰고 일이 시작됐습니다. 주인 할머니와 인사를 나누는 것도 일상이었고요. 저를 "매일 오는 한국인"이라고 기억해 주셨을 때, 속으로 조금 울컥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단지 커피 한 잔을 두고 반복되던 하루가,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는 ‘생활’이 되었다는 사실이 참 따뜻했거든요.
그곳은 분명 제 소유의 공간도 아니었고, 장기 체류지조차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한 달 동안만큼은 제게 가장 ‘집’ 같은 공간이었습니다. 저는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집은 꼭 주소가 있어야 가능한 곳이 아니라는 걸요. 반복되는 일상, 나만의 루틴, 그리고 작은 연결감이 집의 감정을 만들더라고요.
디지털노마드의 '짐' 속에 들어 있는 '집'
많은 분들이 노마드라면 가볍게 떠나는 삶일 거라 생각하시지만, 사실 노마드일수록 ‘자기만의 물건’을 소중히 여기게 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매 도시를 옮길 때마다 꼭 챙겨 가는 물건들이 있습니다. 나무 손잡이가 달린 머그컵, 내가 좋아하는 향의 디퓨저, 그리고 책 한 권. 이 작은 것들이 숙소의 분위기를 집처럼 바꿔주는 역할을 합니다. 공간은 바뀌지만 그 안의 공기와 리듬은 내가 만들 수 있는 거니까요.
물론 매번 이사를 다닌다는 건 쉽지 않습니다. 짐을 줄이고, 익숙했던 것들과 이별하고, 다시 새로운 사람과 환경에 적응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그 반복 속에서도 저는 점점 ‘내가 있는 곳이 곧 집’이라는 감각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도시에서도 어느새 좋아하는 빵집이 생기고, 단골 마트가 생기고, 아침마다 듣는 노래가 생깁니다. 그렇게 내 하루가 그 도시에 새겨질 때, 그곳은 집이 되어갑니다.
떠돌지만, 내 안엔 단단한 뿌리가 있다
저는 이제 더 이상 집을 물리적인 공간으로 보지 않습니다. 저에게 집은 ‘내가 나다울 수 있는 곳’입니다. 꼭 가족이 있어야 하거나, 오래 살아야만 가능한 게 아니더라고요. 때로는 혼자만의 조용한 오후가, 때로는 낯선 시장에서의 따뜻한 웃음이 저에겐 집이었습니다.
디지털노마드로 사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맞는 방식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분명히, 매일 익숙한 것과 작별하며 새로운 장소에 자신을 맞춰나가는 이 삶이, 오히려 더 ‘나’를 만나게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장 많이 떠올렸던 단어가 바로 ‘집’이었습니다.
떠돌면서도 뿌리내릴 수 있는 삶. 그게 바로 제가 선택한 디지털노마드의 진짜 모습이었습니다. 이 삶을 통해 저는 매일매일 나만의 ‘집’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그곳이 베트남이든, 인도네시아든, 말레이시아든 말이지요.
어디에 있든, 내가 나를 가장 편안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공간과 순간을 만들어가는 것. 그게 진짜 집 아닐까요?